에스파냐의 몰락 - 로크루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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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키르홀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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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오스만 전쟁, 코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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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드 훗사르의 몰락, 구스타프 아돌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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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사자와 브라이텐펠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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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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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르틀링겐 전투, 신교도의 궤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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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프랑스가 참전하면서 30년 전쟁은 더 이상 종교전쟁이 아니었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 신교도 국가인 스웨덴과 싸웠던 이전과 달리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같은 가톨릭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게 선전포고한 것이다.
전쟁은 종교를 넘어 자본의 문제가 되었고,
줄기차게 평화를 부르짖었던 교황 우르반 8세의 외침은 모두에게 개무시를 당했다.
'Deus Lo Vult(신이 그것을 원하신다)'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 말은 400년 전부터 통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참전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했다.
프랑스는 1635년과 1636년 전역에서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제 개혁으로 최첨단 군대를 보유한 스웨덴과
스웨덴에게 복날 개 패듯 쳐맞으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보유한 스페인, 제국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1598년 위그노 전쟁이 끝난 이후 40년 간 아무런 실전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군가 신나게 호구짓을 하는 덕분에 스웨덴은 힘든 상황에 처했다.
군비는 바닥나기 직전이었고, 뇌르틀링겐 전투로 총사령관이 포로 주력 야전군이 박살났으며,
요한 게오르그(Johan George) 작센 선제후가 1636년 선전포고했던 것이다.

요한 바네르(Johan Banér)
이 힘든 상황에서 스웨덴군을 지휘한 건 바로 위 사진의 이 남자, 요한 바네르(Johan Banér)였다.
뇌르틀링겐의 패자 구스타프 호른이 구스타프 아돌프의 오른팔이었다면, 바네르는 왼팔이었다.
그는 음식과 와인을 무진장 퍼마시고 매춘부와의 유흥을 즐기는 방탕한 사내였지만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우익을 맡아 제국군 최고의 기병대장 파펜하임의 파상공세를 거뜬히 막아낸 실력자였다.
요한 바네르는 30년 전쟁의 중후반에 최적화된 지도자였다.
그는 공성전이 약점이긴 했지만, 압도적인 쾌속기동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17년간 계속된 전쟁 덕분에 독일 전역이 황폐화되어 있었고,
제국군과 스웨덴군 모두 서로의 빈틈을 노려 그나마 부유한 지역을 털어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바네르는 평생 상대보다 적은 병력을 이끌었지만, 그 상황을 자신의 능력으로 타개했다.
30년 전쟁 후반기가 대중에게 덜 알려진 것도 독일 전역의 황폐화와 멀지 않다.
병력이 많으면 전투는 이겼지만 보급이 부족해 굶어죽었고,
병력이 적으면 보급은 버틸 수 있었지만 전투를 이기기 힘들었다.
브라이텐펠트, 뤼첸, 뇌르틀링겐처럼 양군 총합 5만이 넘어가는 대규모 회전 대신
어떻게든 서로를 따돌리고 뒤치기하려는 기동전이 뒤를 이었다.

17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지도
바네르는 총사령관이 된 직후부터 자신의 실력을 발휘했다.
1636년 비트스톡 전투(Battle of Wittstock)에서 작센군과 조우한 그는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좌익을 통째로 빼내 우회시키는 대담한 기동으로 승리를 거뒀고
1639년까지 작센을 신나게 털어먹는다.
그는 동쪽으로 이동하다 공회전하는 페이크로 4만의 추적병력을 온전히 따돌리며 끈질기게 버텼다.
1638년 함부르크 조약(Treaty of Hamburg)으로 바네르의 숨통이 트였다.
프랑스는 스웨덴에게 연간 1백만 리브르의 전쟁자금을 지원하고,
라인강 유역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제국군이 프랑스를 상대하려 분열하면서 바네르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었고,
그는 프랑스의 지원으로 밀린 급료를 지불하고 부대를 새롭개 재편할 수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바네르는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1639년 쳄니츠 전투(Battle of Chemnitz)에서 승리하며 보헤미아로 가는 길을 연 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신나게 약탈했다.
기세가 오른 바네르는 1641년 얼어붙은 도나우 강을 건너 레겐스부르크를 습격해 황제 페르디난트 3세를 납치하고자 시도했지만,
도나우 강이 생각보다 빨리 녹으면서 실패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추격하는 제국군을 여유롭게 따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작성자 주: 30년 전쟁의 주범 페르디난트 2세는 1637년 사망했고, 아들 페르디난트 3세가 즉위했습니다.

마자랭 추기경(Cardinal Mazarin)
프랑스 또한 초반의 실패를 극복하고 일어서고 있었다.
프랑스는 흙수저들 싸움에 끼어든 금수저와 같았기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돈과 자원,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1636년 뇌르틀링겐의 또다른 패장,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Bernhard of Saxe-Weimar)의 용병대를 고용하고
1639년 베른하르트가 사망하자 또 다시 막대한 돈을 들여 용병대를 통째로 사들였다.
베른하르트의 용병대는 라인강 유역의 요새들을 성공적으로 함락하고 제국 서부를 압박했다.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이 사망하고 권력을 잡은 마자랭 추기경(Cardinal Mazarin)은 전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북부를 노리는 병력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새파랗게 젊은 신참, 엥기엥 공작 콩데(Conde, duc d'Enghien)을 파견했다.

엥기엥 드 콩데. 대(大) 콩데(Conde le Grand)라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프란시스코 드 멜로(Francisco de Melo)는 프랑스 북부의 로크루아(Rocroi) 요새를 포위하는 중이었다.
프란시스코 드 멜로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적이 있기에 콩데를 얕봤고,
로크루아로 가는 좁은 오솔길에 아무런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 없이 로크루아 요새에 도착한 콩데는
스페인의 4,000 기병이 로크루아로 행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루빨리 스페인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1634년 5월 19일, 22,000 프랑스군과 23,000 스페인군은 로크루아 요새 앞 평원에서 조우했다.
프랑스군 기병은 7천으로 5천의 스페인 군에 비해 우세했지만
만 오천명의 프랑스 보병대는 경력이 풍부한 만 팔천 스페인 군에 비해 불리했다.
양 군은 보병이 중앙, 기병이 측면을 맡는 전통적인 대진으로 포진했고
좌우익 기병이 일제히 돌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크루아 전투 양군 병력 배치
프랑스군은 전투 시작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콩데가 지휘한 우익은 스페인군 1열을 돌파했지만 2열에 막혀 후퇴했으며,
습지를 피해 비스듬히 접근한 프랑스군 좌익 기병대는
스페인군 기병대에게 고스란히 드러난 측면을 얻어맞고 붕괴되었다.
보병끼리 붙기도 전에 전투가 끝날 판이었다.

로크루아 전투 1도. 프랑스군 좌익이 붕괴된다.
하지만 콩데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는 중앙의 예비대를 좌익으로 보내 구멍을 메꾸는 한편
스페인군 보병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콩데는 가씨용(Jean de Gassion) 남작의 기병대를 관목숲 뒤로 우회시켜 스페인 좌익을 강타하고,
중앙의 보병대를 전진시켜 스페인 좌익을 완파했다.
콩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군 보병대가 전진했으니 스페인군 보병대의 전진은 시간문제였으며,
그는 스페인군 보병대가 도착하기 전 좌익을 구원하기로 했다.
그래서 콩데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기병 기동을 구사하는데,
우익의 기병대로 스페인 보병대 뒤를 빙 돌아 좌익의 스페인 기병대 뒤를 친 것이다!

로크루아 전투 2도. 콩데의 미친 기병 기동이 보인다.
스페인군 우익(프랑스군 좌익)은 등 뒤에서 들어오는 콩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콩데는 대놓고 적 뒤를 도는 미친 기동으로 전투를 뒤집은 것이다!
모든 기병이 이탈하고, 전장에는 스페인군 보병만 덩그러니 남았다.
콩데는 단단한 보병대 앞에서 침착했다.
그는 가장 약한 왈룽(Walloon,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벨기에) 테르시오부터 붕괴시킨 다음
멜로가 지휘하는 이탈리아 테르시오까지 보병과 기병 돌격으로 후퇴시켰다.
이제 전장에는 6개 대대, 4,500명의 스페인 테르시오만이 남았다.

로크루아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스페인 테르시오
앞서 뇌르틀링겐 전투를 다루며 스페인 테르시오는 최고의 테르시오였다고 서술한 적 있다.
로크루아에 남은 4,500명도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남아있는 테르시오들을 둥그렇게 둘러쌌지만
이 테르시오들은 80세가 넘은 라 퐁텐(La Fontaine)의 지휘 아래 방진을 형성해 꿋꿋히 서 있엇고,
프랑스의 무수한 보병과 기병 돌격, 대포 사격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테르시오의 손해는 갈수록 누적되었지만, 이들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두 개의 부대로 나눠 다시 방진을 형성했다.
콩데는 견디다못해 테르시오를 향해 직접 돌격하지만 머스킷 포화에 직격당했고, 갑옷이 총탄을 막아내 목숨을 건졌다.
전투가 길어지자 프랑스와 노획된 스페인 대포들이 테르시오를 향해 직사포화를 가했다.
결국 해질녁까지 버틴 테르시오들은 콩데에게 항복 의사를 밝힌다.
스페인 지원군의 도착을 염려한 콩데는 이들의 항복을 수락했으며,
이 테르시오들은 무기와 군장, 깃발을 모두 간직한 채 스페인까지 걸어서 돌아갈 수 있었다.
(보통 요새가 함락될 때의 항복 조건이다. 테르시오가 얼마나 단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
스페인 테르시오들은 살아 돌아갔지만, 스페인 군은 궤멸되었다.
프랑스군이 4천명의 사상자를 냈던 반면, 스페인의 사상자는 1만이 넘었다.

로크루아에서 스페인군의 항복을 허락하는 콩데.
로크루아의 승리는 무적의 스페인 육군이 처음으로 패배한 야전이었다.
루이 13세가 로크루아 전투 5일 전 사망하고 4살의 어린아이인 루이 14세가 즉위했기 떄문에
이 전투는 새 왕의 치세를 축복하는 상징으로 포장되어 프랑스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루이 14세는 콩데 덕에 자신의 치세를 편안하게 시작했다.
로크루아 전투는 전쟁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윙드 훗사르나 테르시오같이 한 병종의 사기성을 가지고 승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0년 전쟁은 전투에서 보병, 기병, 포병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강조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나 콩데 같은 장군들의 활약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로 계승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이 영역의 끝판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이어져 근대 전쟁의 흐름을 형성한다.

포병을 권총처럼 쓰는 남자, 나폴레옹은 병종간 유기적 움직임의 끝판왕이었다
스페인은 로크루아의 패전을 회복하지 못했다.
마자랭은 30년 전쟁 이후에도 스페인을 두드렸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스페인과 합스부르크를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스페인은 30년 전쟁을 마지막으로 1류 국가에서 사라졌다.
사가들은 로크루아를 스페인 몰락의 시작이라고 평한다.
스페인 테르시오의 저항은 영웅적이었지만, 그들은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로크루아는 스페인이 마지막으로 빛났던,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