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과 싸우며 고려에 보답한 베트남 귀화왕족
본문
고려 고종때 세계최강의 몽골군과 30여년의 전쟁을 치루던 시기였다.
그 중 수성의 귀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이용상이다.
1253년 12월 이용상은 동쪽 화산에 살고 있었는데
옹진성 고을 수령이 이용상에게 몽골군이 쳐들어왔다며
도움을 청하자 이용상은 위효관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대를 나누어
수성전략을 세웠다.
삼면에 토성으로 성벽을 쌓고 전면에 목책을 높이 세웠으며
동굴을 파서 땔감과 나무를 비축하고 몽골군이 대포를 쏘면
함께 쏘고 성벽을 넘으면 뜨거운 물을 부어 철저히 방비하였다.
몽골군이 5달이상을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당하지 않았다.
전투가 계속되자 몽골군에서는 화친을 청하며 황금상자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용상과 마을수령은 망대를 높이 쌓아 위엄을 보이며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용상은 몽골군을 쉽게 믿지 않았고
상자속을 의심하여 상자를 묶고 구멍을 뚫게 하였다.
구멍을 뚫어보니 자객이 숨어 있었다.
이용상은 즉시 끓는 물을 붓도록 명령했고 그 자객은 안에서 죽었다.
그리고 금종이로 바르고 적진에 도로 던져주라고 명했다.
몽골군은 상자를 돌려받은 후에 깜짝 놀라 성을 함락할 방법이
없자 결국 철수했다.
그러나 이용상이 매복시킨 고려병사가 기습하여 몽골군을 격파하고
수백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에 고려 고종은 이용상의 관직을 높이고 웅진 화산 지방 30리 인근과
식읍 2천호를 하사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의 문미에
수항문이란 글자를 써서 내렸다.
이 이용상은 화산 이씨의 시조이며 베트남의 왕족이었다.
베트남 리 왕조의 6대 황제 영종 이천조의 7번째 아들이다.
1226년 반란이 일어나 쩐 왕조가 건국되고 리 왕조가 멸망하여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표류해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정착했다고 한다.
화산 이씨로는 고려 무인시대의 이의민,
(이의민은 천민이라 족보를 세탁한 것이라는
논란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훗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던 두문동 72현 중 하나인 이맹운,
임진왜란 때 19살에 문경 전투에서 전사한 이장발 등이 있다.
지금도 북한의 옹진군에는 화산성과 망국단, 월성암 등이 있는데
망국단은 산 정상에서 고향인 베트남 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곳이고
월성암은 베트남을 그리워하다 울부짖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